일본에서 한국인은 동경대 나와 일본국적 중의원 정치인도 자살함
'이래도 일본 유학 올래?|일본 취업 현실|도피유학 팩폭|일본 워홀|일본 생활 현실'에 달린 댓글 (tistory.com)
불법 정치자금 연루 혐의
근데 일본인 정치인들 그렇게 따지면 많아 왜 한국계 출신만 혹독하게 대하는지
도쿄대 출신 일본으로 귀화한 한국계 정치인 아라이 쇼케이 자살
아라이 쇼케이는 일본 사회 희생양 - 시사저널 (sisajournal.com)
‘한국계’ 알려진 후 인신 공격 시달려…선거구민들도 “표적 수사” 비난
지난 2월19일 오후 3시50분께 한국계 일본 중의원 아라이 쇼케이(新井將敬) 의원이 도쿄 퍼시픽 호텔 2338호에서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텔레비전 임시 뉴스로 전해졌다. 기자는 나가노 겨울 올림픽 경기를 텔레비전으로 시청하다가 이 긴급 뉴스를 보고 먼저 ‘왜’ 하는 의문을 떠올렸다.
이어서 전화벨이 울리더니 한 한국인 여성의 흥분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아라이 의원의 죽음은 일본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주식 투자로 정치 자금을 마련해 온 정치인이 어디 아라이 의원 한 사람뿐입니까? 그가 일본의 정치 구조에서 위험한 인물이기 때문에 희생양이 된 것입니다. 아라이 의원은 귀화한 재일 한국인 출신 정치인으로서, 그런 일본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전화의 주인공은 일본 주오(中央) 대학에서 외국인 문제로 박사 학위를 딴 뒤 같은 대학 사회학부에서 강사로 근무하는 고선휘 박사였다. 그는 이런 말을 한 뒤 전화를 급히 끊고 한 논문을 팩시밀리로 보내왔다.
<귀화 대의사의 신화>. 박 일이라는 재일 동포 학자가 집필한 아라이 의원의 정치적 수난사였다. 이 논문에 따르면, 아라이 의원은 48년 12월12일 오사카에서 건설업을 하던 재일 동포 2세 실업가 박의남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의 이름은 박경재(朴景在). 아라이 의원의 조부는 부산 근방 출신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친이 건설업을 해 집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으나 재일 동포 3세인 그도 유년 시절에는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뼈저리게 경험했다고 한다. 아라이 의원은 86년 7월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된 뒤 일본의 한 잡지와 인터뷰할 때 자신의 유년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 나는 조선 국적(귀화 전 부모의 국적은 한국이 아니라 북한이었다)이었기 때문에 일본 소년들이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나 자신은 틀림없이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는데도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별세계 사람 취급을 당하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주식 투자 정치인이 그뿐인가?”
어린 그가 고뇌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부모는 아들의 장래를 생각해 일본으로 귀화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66년 10월 부모의 귀화 신청이 인정되어 박경재라는 이름은 아라이 쇼케이로 바뀌었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아라이 씨는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사회를 꿈꾸고 일본 국적을 취득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저팬 드림’을 꿈꾸고 일본 국적을 얻은 청년 아라이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본의 엘리트 코스를 달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도쿄 대학 이학부(나중에 경제학부로 편입)에 입학했다. 청년 아라이는 도쿄 대학 입학과 함께 매일같이 이른바 ‘동대 투쟁’에 참가하는 학생 운동가로 변신했다.
아라이 의원의 생전 고백에 따르면, 대학 졸업과 함께 육체 노동자가 되고 싶어 일본 제일의 제철회사인 신닛데쓰(新日鐵)에 입사했다. 그러나 아라이 씨는 일본을 움직이는 대장성 관료가 되기 위해 맹렬히 공부하여 단 3개월 만에, 한국으로 치자면 행정 고시에 합격했다. 당시 대장성은 현역 도쿄 대학 법학부 학생이 아니면 들어가기가 힘든 곳이었으나, 아라이 씨는 민간 회사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대장성의 좁은 문을 무난히 통과했다.
아라이 씨가 정치인이 되기를 꿈꾸게 된 것은 당시 후생 대신이었던 와타나베 미치오(渡邊美智雄)의 비서가 된 것이 계기라고 알려지고 있다. 와타나베 씨는 생전 한 잡지와 인터뷰에서 ‘아라이 군을 처음 대하는 순간부터 비상한 능력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래서 와타나베 씨는 농수산 대신과 대장성 대신을 거치는 동안 계속 그를 비서로 데리고 다니며 총애하다 중의원 출마를 권유했다.
아라이 씨가 아무런 연고도 없이 첫 출마한 도쿄 2구라는 선거구도 와타나베 씨가 마련해 주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이다. 소선거구제가 실시되어 지금은 도쿄 4구로 변한 아라이 씨의 선거구는 중소기업이 밀집한 가마타(浦田). 그가 자살한 퍼시픽 호텔이 있는 시나가와(品川) 가의 중심이다.
그렇다면 아라이 씨의 선거구민들은 왜 그가 재일 한국인 출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연속 네 번이나 뽑아 주었던가. 또 아라이 씨의 자살을 선거구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기자는 도쿄 역에서 전차로 15분 거리인 가마타 역 앞 아라이 씨의 사무실을, 그가 자살한 이틀 뒤인 21일 정오에 찾아갔다.
조그만 건물 2층에 있는 아라이 씨의 선거 사무실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썰렁했다. 30대 초반인 남자 비서가 모든 서류와 자료를 검찰에 압수당했다고 알려 주었다. 그러나 그는 기자의 질문에는 답변하고 싶지 않다고 손을 내저었다. 더 질문해도 소용이 없다고 느낀 기자는 사무실을 나와 맞은편 다방에 들렀다. 50대 다방 주인에게 아라이 씨의 자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대뜸 “주식 투자를 하고 있는 정치인이 아라이 씨 한 사람뿐이냐”라고 반문했다. 그는 아라이 씨가 첫 출마한 83년 12월부터 지지자였다고 말하면서, 아라이 씨의 젊음과 추진력을 이곳 선거구민들은 높이 사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가 재일 한국인 출신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는 질문에는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 번 일본 국적을 취득했으면 일본인이지 출생을 따져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고 대답했다. 아라이 의원 후원회 간부인 다나하시 다케오(柵橋武夫·호텔 경영) 씨도 “그가 재일 한국인 출신이라는 것을 첫 출마 때부터 알았다. 선거 때마다 젊은 아라이 씨가 10만표 정도 획득했다는 것은 이곳 선거민들이 그의 출생 문제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는 증거가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아라이 씨는 첫 출마 때 귀화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갖은 중상과 비방을 받았다. 83년 11월 중의원 선거가 고시되자 일본 신문들은 아라이 씨의 경력 끝에 ‘부모가 한국인으로서 어릴 때 일본에 귀화’라고 한 줄을 달았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보도가 나간 직후부터 아라이 씨는 다른 후보 진영과 우익 그룹으로부터 집요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같은 당 의원이 공격 선봉
가장 심했던 것은 같은 자민당 후보였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진영의 인신 공격이었다. 이시하라 의원의 제1 비서는 아라이 후보의 포스터 약 2천장에 ‘조선(북한)으로부터 귀화한 자’라는 스티커를 붙이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이시하라 의원 본인도 거물 정치가답지 않게 주간지를 이용해 아라이 후보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귀화한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은 차별·편견과 관계없이 문제가 된다. 한·일 간에 마찰이 일어날 경우, 그는 어느 쪽의 국익을 우선할 것인가.’
아라이 씨는 86년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한 후 아시아 경기대회 참석차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한국 기자들에게 이렇게 답변했다. “나의 조국은 일본입니다. 나는 재일 한국인 대표로 당선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의미에서 한·일 간의 파이프라인 역을 해 보고 싶습니다.”
아라이 씨는 자살하기 전 국회 청문회에서 자기가 재일 한국인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짊어지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이어 “주식 투자를 하는 국회의원이 수백 명이나 되는데 하필 왜 내가 표적 수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느냐”라고 항변했다.
아라이 씨의 볼멘 소리를 빌릴 것 없이 일본의 증권회사에 주로 정치인을 상대하는 ‘VIP 계좌’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 ‘정치인 관련주’라 하여 갑자기 주가가 폭등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가마타에서 만난 선거구민들도 똑같은 이유를 들어가며 아라이 의원이 본보기로 검찰의 표적이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앞서의 고선휘 박사는 “일본계 2세인 페루의 후지모리 대통령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귀화 외국인 아라이 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일본 사회의 폐쇄성과 그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도쿄·蔡明錫 편집위원